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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김홍기_텍스트의 틈, 이미지의 구멍 KIM Hongki

텍스트의 틈, 이미지의 구멍

김홍기

 

임영주는 배분에 능하다. 그는 아침 일일극을 시청하고 명상에 잠기고 갖가지 작업을 진행하고 저녁 일일극을 시청하는 식으로 일과를 배분하고 실천한다. 버겁지도 않고 헐겁지도 않게 가장 알맞고 천연한 방식으로 일과를 배분하는 솜씨가 꽤나 좋다. 그의 최근 개인전에서도 배분의 능숙함은 돋보인다. 산수문화에서 열린 <오메가가 시작되고 있네>(10월 11일~31일)는 외관상 회화와 설치 작업을 내놓은 전시로 보이지만 동시에 그의 여러 비디오 작업이 홈페이지를 통해 정해진 시간표에 맞춰 상영된 이원적 전시이다. 물리적인 전시공간을 회화와 설치에 할애하고 비물리적인 인터넷 공간을 비디오 작업에 할애하는 형식으로 그는 요령껏 개인전의 출품작들을 배분한다. 제한된 전시공간 안에 회화와 비디오를 전부 욱여넣지도 않고, 그렇다고 전시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작품을 쉽사리 내치지도 않는다. 주어진 조건하에서 배분의 묘를 발휘하면 될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배분의 이유가 단지 전시공간의 물리적 한계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임영주는 자신의 회화가 전시공간에서 관람되길 원하고 자신의 비디오가 관객 각자의 공간에서 관람되길 원한다. 각각의 작품마다 그것이 선보일 수 있는 가장 알맞은 방식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임영주는 개인의 일과든 전시의 형태든 주어진 물리적 조건하에서 가장 적절하고 자연스러운 배분의 방식을 추구한다.

작가의 이런 기질은 그가 작업하는 방식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그의 생각은 때로는 회화로, 때로는 출판물로, 때로는 비디오로 자연스럽게 배분된다. 이는 생각의 원류가 임의로 조성한 물길을 따라 구획되는 것이 아니라 유속과 지형의 차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물줄기가 갈라지는 것에 가깝다. 어떤 물줄기는 텍스트의 속성을 띠면서 출판물로 흘러가고(『괴석력』), 또 다른 물줄기는 특유의 물성을 갖춘 회화나 설치 작업으로 귀결되고(산수문화에 전시된 작업들), 어떤 물줄기는 시청각적 이미지의 편집을 거쳐 비디오 작업으로 모여든다(웹 상영회의 상영작 목록). 이렇게 자생적으로 갈라진 사유의 물줄기들 사이에 위계는 들어서지 않는다. 이것들은 하나의 원류에서 내뻗은 것이기에 각자 독립성을 유지하면서도 서로가 서로를 반영한다. 예컨대 임영주가 한동안 파고든 동해시의 추암 촛대바위는 개인전에 전시된 여러 회화의 소재로 쓰이고, 그의 출판물 『괴석력』 제1장의 소재이기도 하며, <애동>(2015)이나 <극광반사>(2017)와 같은 비디오 작업에서도 거듭 등장한다. 하나의 괴이한 바위가 사유의 물줄기를 따라 다양한 매체로 표현되는 것이다. 이로부터 촛대바위라는 텍스트, 촛대바위라는 회화, 촛대바위라는 비디오가 배분되어 각자 독립성을 유지하면서도 간혹 서로 맞물리기도 하는 것이다.

 

여러 매체를 유연하게 활용하는 임영주의 작업은 공통적으로 어떤 틈이나 구멍을 마련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그 틈이나 구멍은 작가의 상상이 시작되는 입구이기도 하고 그것이 종료되는 출구이기도 하다. 이런 특징은 작가가 언어를 활용하는 여러 방법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먼저, 은어에 주목하는 경우가 있다. 작가는 해돋이의 모습을 일컫는 ‘오메가’, 사금을 채취하는 사람들이 사금을 일컫는 ‘요정님’, 청소년들이 말싸움을 끝낼 요량으로 외치는 ‘오로라반사’ 등 특정 집단이 전유한 은어를 통해 단어의 사전적 의미에서 비켜난 자리에서 언어의 틈을 확보한다. 그런가 하면 그의 2016년 개인전 제목 ‘오늘은편서풍이불고개이겠다’의 경우에는 문장 전체를 의도적으로 붙여쓰기함으로써 ‘불고 개이겠다’라는 기상예보의 전형적인 서술어에 ‘불고개’라는 다소 불길한 합성어를 슬쩍 겹쳐 넣어 언어의 틈을 벌린다. 역시 날씨와 연관된 그의 비디오 작업 <대체로 맑음>을 보면, ‘기상(氣象)’은 대기 중에서 일어나는 물리적인 현상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지만 작가는 한자어를 곧이곧대로 해석함으로써 과학적인 의미를 비틀어 ‘에너지(氣)의 형상(象)’에 대한 신비적인 이야기를 풀어낼 틈을 만든다. 동음이의어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의 비디오 작업 <총총>의 제목은 ‘촘촘하고 많은 별빛이 또렷또렷한 모양(Starry Starry)’이면서 동시에 ‘편지글에서, 끝맺음의 뜻을 나타내는 말(悤悤)’을 뜻한다. ‘총총’의 이런 의미의 차이가 만들어내는 간극 사이로 작가의 우주적인 상상이 펼쳐진다.

이런 구도에서 보면 오늘날의 물리학, 천문학, 기상학 등 과학적 사고에 기반을 둔 언술마저도 그 이면에 비과학적 상상의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다. 『괴석력』의 첫 페이지는 편서풍을 형상화한 기상도와 함께 초중등 과학 교과서에 등장할 법한 두 개의 명제가 적혀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여러 곳에서 □□이 일어난다. 이것은 지구가 계속하여 활동하고 있다는 하나의 증거이다.” “활동과 □□은 어떻게 일어나며, 이때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에 대하여 알아보자.” 과학적 사고의 측면에서 보자면 이 명제들의 빈 칸은 합리성과 객관성에 근거해 정해진 답을 채워 넣어야 하는 공간이지만, 임영주에게 그것은 과학을 초과한 세계의 신비로 통하는 관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구멍과 같다. 『괴석력』은 그가 이 구멍에서 수집한, ‘정답’을 초과하는 여러 현상과 자료로 채워져 있다. 이것은 작가의 표현에 따르면 ‘미신’의 영역인데, 기존의 무속 신앙이나 기복 신앙뿐만 아니라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근거가 모호하지만 엄연히 현실에서 작동하는 온갖 종류의 범속한 믿음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돌은 이 보편적인 미신의 영역을 함축한 물체로 제시된다. 촛대바위나 선바위처럼 영험한 힘이 있다고 여겨지는 돌뿐만 아니라 흔하디흔한 돌멩이부터 달과 지구와 같은 천체의 거대한 돌까지 어쩌면 우주의 모든 돌이 괴석일는지도 모른다. 각각 남다른 모양을 지닌 돌에 대해서 일반적이고 정상적인 모양을 말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임영주에게 괴석력이란 지질학으로 온전히 분석되지 않는 물체의 힘이다. 기하학으로 온전히 작도되지 않는 난반사의 현현이다. 즉 합리적으로 온전히 해명되지 않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미신’의 활력이다.

‘괴석력’이 발휘될 수 있는 틈이나 구멍에 대한 열정은 개인전 <오메가가 시작되고 있네>에서 선보인 회화와 설치 작업에서도 여전하다. 예컨대 붉은 해가 솟아오르며 ‘오메가’ 현상이 벌어지는 순간, 또는 촛대바위의 꼭대기에 해가 걸리면서 이른바 ‘해꽂이’가 일어나는 순간이 과학적 합리성을 초과하는 임영주의 회화적 상상이 시작되는 틈이나 구멍으로 기능한다. <밑_문>은 촛대바위를 수직으로 잘라서 좌측과 우측을 두 폭의 캔버스에 나눠 그려 촛대바위 사이로 벌어지는 상상의 틈을 형상화한 작업이다. 전시공간의 한 벽을 27개의 크고 작은 여러 모양의 캔버스로 채운 <밑_오메가 밤 산 물 소리 빔 촛대 물 돌 맑음>은 그 틈 사이로 펼쳐지는 여러 사물과 사건을 형상화한 작업이다. 상서로운 이미지들이 모여 또 다른 커다란 상상의 몽타주로 이어지는 것이다. 다른 한편, 어항이나 수족관을 열심히 꾸미며 이른바 ‘물생활’을 영위하는 사람들이 장식을 위해 바위 모양을 본떠 만드는 ‘백스크린’을 마치 부조처럼 설치한 작업 <물생활_‘눈을 가늘게 뜨고 보거나 한 곳을 보다 보면 그렇게 보입니다.’>는 합리적 세계의 외부로 통하는 틈이나 구멍을 확보하는 또 다른 방법을 제안한다. 그것은 눈을 가늘게 뜨고 보면서 눈꺼풀 자체를 하나의 ‘틈’으로 만들거나 한 곳을 끈질기게 보면서 그곳을 하나의 ‘구멍’을 여기는 것이다. 언뜻 싱거워 보이는 얘기지만 온갖 종류의 범속한 믿음의 계기가 이러한 제안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작가의 일과에 포함된 명상도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시작될 듯싶다.

이런 측면에서 임영주가 원형의 캔버스를 즐겨 쓰는 까닭도 유추해볼 수 있다. 작가는 사각의 캔버스가 주는 안정적인 느낌과 달리 원형의 캔버스가 자아내는 어딘지 모를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느낌에 종종 끌린다고 말한다. 만일 과학의 합리적 근거가 제공하는 인식의 안정성을 사각의 캔버스에 비유할 수 있다면, 원형의 캔버스는 합리성의 관점으로 온전히 포섭되지 않은 채 실존하는 믿음의 세계를 담아내는 프레임일 수 있다. 그렇다면 벽에 걸린 원형의 캔버스는 돌출된 회화의 이미지가 아니라 합리성의 외벽에 뚫린 큼지막한 ‘구멍’을 통해 엿보이는 믿음과 정념의 이미지일는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그의 비디오 작업에서도 원형의 이미지가 즐겨 사용된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예컨대 <극광반사>의 초반부에서 원형의 이미지가 좌우로 오가는 장면이 보이고, <총총>에는 사각의 스크린에 여러 종류의 원형 이미지들이 삽입되어 있고, <대체로 맑음>에서도 마찬가지로 ‘氣象’이라는 글자를 마치 서치라이트처럼 훑고 지나가는 원형의 이미지를 비롯해 여러 원형의 프레임이 삽입되어 있다. 이런 이미지들 역시 사각의 스크린에 뚫린 동그란 구멍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임영주의 최근 비디오 작업 중에서 물리적 세계와 정신적 세계를 잇는 틈이나 구멍의 모티프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극광반사>이다. 이 작업의 도입부는 이번에도 촛대바위의 이미지에서 시작되는데 작가는 시각효과를 이용해 바위의 이미지를 겹치고 번지게 만들어 상상의 세계로 진입할 틈을 벌린다. 그리고 후반부에는 다소 추상화된 선바위의 이미지를 보여주면서 그 바위틈을 통해 상상의 세계에서 빠져나갈 출구를 마련한다. 이처럼 비디오를 통해 조성된 틈이나 구멍은 강한 인력으로 관객의 시선을 잡아당긴다. 그의 비디오 작업 자체가 어떤 물체의 에너지, 즉 ‘괴석력’을 띠게 된 것이다. 이외에도 <워터/미스트/파이어/오프>, <총총>, <대체로 맑음> 등 임영주가 올해 제작한 비디오 작업들은, 작가가 직접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타인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제작했던 과거의 비디오 작업들과 달리, 주로 파운드 푸티지와 시각효과만을 사용해 내적인 상상의 세계에 집중한 까닭에 더욱 강한 인력을 띠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임영주가 여러 매체를 요령껏 배분해서 선보이는 작업들은 근대과학의 합리적 세계에 틈이나 구멍을 만든다. 그리고 이로부터 합리의 세계와 비합리의 세계, 과학의 세계와 미신의 세계, 인식의 세계와 상상의 세계 사이의 만남을 도모한다. 이는 두 종류의 세계 간의 갈등이나 반목을 조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두 세계는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구분되면서도 연결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임영주는 두 세계의 ‘마디’를 만들어낸다. 무릎 관절이 허벅지와 종아리를 대립시키지 않듯이, 임영주의 ‘물렁뼈와 미끈액’은 과학과 미신을 대립시키지 않는다. 그는 글리치 효과(glitch effect)를 사용한 기술적 이미지로 정신의 세계를 시각화하며, 미항공우주국(NASA)에서 제공한 과학적 이미지로 미신의 풍경을 그려내며, 불장난과 야뇨증의 관계에 접근할 때도 꿈풀이의 서사만큼이나 두뇌와 비뇨기의 의학적 상호관계에도 관심을 가진다. 중요한 것은 과학과 미신의 마디를 적절하고 자연스럽게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금 배분이 관건이다. 일과의 배분, 전시 방식의 배분, 작업 매체의 배분뿐만 아니라 과학과 미신의 배분까지 스케일이 다른 모든 종류의 배분이 관건인 것이다. 그리고 임영주는 배분에 능하다.

(미술세계 VOL.397)
 

김홍기는 서울대 미술사학과 학사와 동 대학원 철학과 석사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 3대학교 미학박사를 수료했다. 제5회 ‘플랫폼 문화비평상’ 미술평론 부분에 당선되었으며, 현재 미술비평과 번역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번역서로는 로잘린드 크라우스, 할 포스터 외의 『1900넌 이후의 미술사』(공역, 2016, 3판)와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의 『반딧불의 잔존: 이미지의 정치학』(2012)이 있다.